한번 정리해두면 좋겠다 싶어서 짧게 정리하자.

효용 괴물 (Utility Monster)

  • 기원: 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이 1974년 저서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Anarchy, State, and Utopia)》에서 제시한 사고실험이다.

  • 개념 및 내용:

    •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사회 전체의 쾌락(효용)의 총합을 극대화하는 것을 정의로 본다.
    • 노직은 어떤 단위의 자원(예: 빵 한 조각)을 투입했을 때, 일반인보다 수천 배, 수만 배의 효용(행복감)을 느끼는 가상의 존재인 ‘효용 괴물’을 가정했다.
    • 공리주의 논리에 따르면, 자원을 평범한 사람 여러 명에게 나누어 주는 것보다 효용 괴물 한 명에게 몰아주는 것이 사회 전체의 총 효용을 훨씬 더 크게 만든다.
  • 해석 및 의의:

    • 극단적인 효용 창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있다면, 공리주의 원칙 하에서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자원과 권리를 그 괴물에게 희생하고 착취당해야 한다는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한다.
    • 이는 분배의 정의나 개인의 기본권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총합의 극대화’에만 집중하는 고전적 공리주의의 치명적인 결함을 폭로한다.

〈오멜라스는 떠나는 사람들〉(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

  • 기원: 미국의 SF·판타지 작가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이 1973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윌리엄 제임스의 철학적 에세이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되었다.

  • 줄거리:

    • ‘오멜라스’는 질병과 결핍이 없고, 시민 모두가 눈부신 풍요와 예술, 지적 쾌락을 누리는 이상적인 유토피아다.
    • 그러나 이 도시의 완전한 행복 뒤에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조건이 존재한다. 한 지하실의 어둡고 불결한 방에 아이 한 명을 가두고 끊임없이 고통과 방치를 겪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 도시의 모든 성인은 성인이 될 무렵 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다. 아이를 구출하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는 순간, 오멜라스의 모든 번영과 평화는 즉시 파괴된다.
    • 대다수 시민은 처음에는 충격을 받지만, ‘다수의 엄청난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며 타협하고 체제에 순응한다.
    •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이 현실을 묵인하지 못하고, 오멜라스의 안락함을 버린 채 불확실한 어둠 속으로 홀로 걸어 나간다. 이들이 바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다.
  • 해석 및 의의:

    • ‘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공리주의적 정당화의 비윤리성을 드러낸다.
    • 떠나는 행위는 불의한 체제에서 얻는 이익을 거부하는 소극적 저항이자 도덕적 결단을 상징하며, 독자에게 자신이 누리는 안락함 이면에 누군가의 구조적 고통이 존재하는지 묻는다.

두 개념의 비교 및 공통점

비교 항목효용 괴물 (Utility Monster)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Omelas)
형식분석철학적 사고실험문학적 알레고리 및 사고실험
비판 대상총합 중심의 공리주의 논리소수의 희생을 전제로 한 다수의 공리주의
초점상위 소수의 과도한 이익 독점하위 소수의 비인도적 희생 강요
핵심 메시지개인의 권리와 공정한 분배 없는 총량주의의 맹점침해될 수 없는 인간 존엄성과 체제 공모에 대한 저항

실증 경제학 vs 규범 경제학

공리주의에 관해 생각하다보면 항상 함께 떠오르는 것은 경제원론 첫머리에 등장하는 이 대목이다. 실증 경제학과 규범 경제학의 차이. 내 마음대로 이해한 바에 따르면, 실증 경제학이란 경제/정책 주체의 가치판단과 무관해서 경제주체의 경제활동에서 비롯될 수 밖에 없는 객관적인 결과이다. 실증 경제학의 측면에서 경제학의 정답은 파레토 효율이다. 즉, 누구도 더 나아지게 할 수 없는 물질적인 배분 상태가 그것이다. 규범 경제학은 그 위에 선다. 규범 경제학은 규범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지 않는다. 어떤 규범이 주어졌을 때 이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지를 실증 경제학의 도구/기준으로 다룬다.

경제학은 사실 공리주의가 없으면 대체로 성립하지 않는다. 소비자 이론의 효용이라는 개념이 그렇고 후생 경제학의 사회 후생(social welfare)라는 개념이 그렇다. 어쩌면 문제는 공리주의 자체가 아닐 수 있다.

실증 경제학과 규범 경제학을 지속적으로 구분하려 해온 그 지적인 태도가 문제 아니었을까? 세계화로 인해 파이의 크기가 늘어난다고 해도, 만일 특정 경제주체가 그 늘어난 몫을 배분받지 못할 때 문제 혹은 그렇다고 느낄 때 시장이라는 기계에 모래가 뿌려지는 것과 다름 없다. 그렇다면 모래를 뿌리는 일은 무지하고 경제적인 이성에 반하는 일일까?

이런 류의 질문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것이 어쩌면 경제학의 원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