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조 미키히코, “백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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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추리 소설
Author

JS HUHH

Published

January 30, 2024

The Book

TL; DR

  • 명불허전이다. 렌조 미키히코라는 작가를 알게 되서 기쁘다.
  • 번역이 세심하다. 원작이 지녔으리라 짐작되는 문체와 작풍을 느낄 수 있다.

완벽한 구조

렌조 미키히코의 “백광”은 완벽한 추리 소설이다. 이 작품에는 추리 소설이 갖추어야 하는 기본기가 두루 잘 들어 있다. 소설은 인물 간의 뒤틀린 관계 설정, 갈등의 핵심을 이루는 서사의 반복과 변주 그리고 거듭되는 반전에도 무너지지 않는 극의 설득력을 지닌다.

“백광”은 1명 빼고 가족으로 엮인 7명의 고백으로 구성된다. 나오코라는 네 살짜리 여자 아이가 이모의 집에서 살해 당하고 집 앞마당에 매장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진범을 찾아가는 소설은 7명의 관점에서 같은 사건이 각자의 시선과 경험을 통해 서술되고 해석된다. 7명 각각이 지닌 파편 증거에 기반을 둔 추측과 추리가 번갈아 등장한다. 소설의 이런 구조 때문에 추리 소설의 뼈대인 ’누가 범인인가’의 질문이 계속 수면 위로 떠오른다. 추리 소설의 맛이란 이 질문을 어떻게 바꿔가며 지루하지 않게 던질 수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은가.

전지적 혹은 관찰자 시점을 지닌 탐정이나 경찰이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각각의 ’추리’는 거의 소설 끝까지 불완전한 채 남는다. 각자의 독백을 읽게 되면 이것은 진실일까 아니면 거짓일까 하는 의문이 계속 맴돈다. 작가는 이런 뒷맛을 의도했다. 책을 읽으면서 영화 “라쇼몽”을 보는 듯한 기분이 종종 드는 것은 소설의 이러한 독특한 서술 구조 덕분이다.

독자만 알 수 있다!

치매를 앓는 듯한(?) 시아비지의 독백이 소설을 열고 닫는다. 세대와 인물을 넘나들며 반복된 살인, 배신 그리고 각자의 후회와 증오가 소설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각 장을 채우는 인물의 말투와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그 장의 마지막에 의표를 찌르듯 종종 등장하는 ’…하지만 OO은 범인이 아니다’의 구절은 반전을 앞세운 TV 연속극인가 싶기도 하다.

“백광”에는 전형적인 추리 소설의 클리셰, 즉 뛰어난 지략의 탐정, 초월적인 범죄자 혹은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경찰 등이 없다. 소설의 사건 앞에서 모두가 범인이면서 동시에 모두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 각자 진실의 일부를 알고 있지만 진실의 조각으로는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 7인의 독백과 대화를 모두 읽은 독자만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는 셈이다. 어쩌면 이 대목이 소설 “백광”의 가장 근사한 트릭이 아닐까?